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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한 복음과 팀 켈러의 좌익 사상

2023년 5월 팀 켈러 목사님의 서거에 깊은 조의를 표하며 가족들과 친지, 뉴욕의 리디머 교회가 이 기간에 하나님의 참 평안과 위로가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최근 복음주의 기독교계에는 팀 켈러 목사님의 삶을 돌아보며 여러가지 찬미와 찬사가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로 팀 켈러 목사님은 뉴욕시에서 성공적인 개척과 목회, 또 많은 신앙 서적들과 Redeemer City to City 국제사역을 통해 20-21세기 많은 영향력을 끼친 하나님의 종이셨고 그런 면은 널리 공유 되고 celebrate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20대 때 팀 켈러 목사님의 ‘결혼의 의미’ 등 저서를 통해 많은 신앙의 유익을 누렸고, 또 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젊은 층 목회자들 사이에서 팀 켈러 목사님의 영향력은 굉장합니다.

교회 뿐만 아닙니다. 팀 켈러 목사님처럼 이 세상 대중 언론과 미디어에서 존경과 찬사만 받은 목회자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지 사설 뿐만 아니라 The Atlantic가 같은 온라인 극좌파 사이트에서도 팀 켈러 목사님의 글이 게재 될 정도로 팀 켈러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1]

하지만 팀 켈러 목사님은 공인이기에, 그의 목회 철학과 사상에서 우리가 한 번 반드시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이 세상의 칭찬 보다는 영광 가운데 대면할 우리 주 예수님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교회라면 말입니다.

제가 처음 팀 켈러 목사님의 사상에 질문을 갖게 된 것은 2022년 4월 입니다. 트위터 상에서 낙태에 대해 말하면서 “낙태는 정치적인 이슈이기에 기독교인들은 낙태를 합법화 해라 말아라 에대해 섣불리 말하면 안된다”라는 정말 상식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납득하기 힘든 발언을 한 것입니다. [2] 도대체 어떠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팀 켈러 목사님은 현재 사회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백만명의 아이들의 살인에 대해 이러한 발언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시작된 저의 질문은 파면 팔수록 팀 켈러 목사님의 사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연속으로 이어집니다. 이 짧은 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만, 최종 판단은 독자에게 맡깁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본인이 중고등부 때 만난 지도교사(극좌파 행동주의자)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3]. 대학교 진학 이후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문화적 공산주의 (Critical Theory of the Frankfurt School) 에 큰 공감을 하고, 신영복을 제일 존경한다는 어떤 정치인 같이, 팀켈러는 자주 자신이 존경한다는 신학자로 Gustavo Gutiérrez (막시즘을 카톨릭 신학에 접목시켜 해방신학을 만든 남미 카톨릭 주교)를 인용하며 “God’s preferred option for the poor” 문구를 자주 쓰며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라”) 말씀을 무시하는 가치관을 자신의 목회에 반영하고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였습니다. [4]

먼저 팀 켈러 목사님이 대학교 때 그토록 공감했다는 문화적 공산주의를 다루어야 하겠습니다. 문화적 공산주의는 불평등을 이 세상의 제일 큰 악으로 보고, 모든 문제를 불평등 및 권리차이의 관점으로 보는 성경과 상반된 세계관입니다. 이들은 인류를 구조적인 압제에서 해방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드디어 불평등이 없는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정치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는 몽상가들입니다. 공산주의의 무신론적/유물론적 시작점도 물론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이 공산주의 세계관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개개인의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로 보지 않고, 오히려 여러 그룹 정체성(성별/인종/성적성향 등)의 렌즈로만 인류를 해석하고 또 오로지 외부적인/체계적인 ‘불평등/부조리’의 피해자로 여기는 사상입니다. 이 사상에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간의 존엄성은 없습니다. 또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이 여러 형태의 막스주의는 이미 Eric Voegelin과 같은 철학자들로 인해 고대 영지주의(Gnosticism)의 한 변형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지금 미국은 그래서 이 문화적 막스주의의 하나인 critical race theory (비판적인종이론: CRT)가 체계적으로 교과과정에 삽입이 되면서 한 세대의 젊은이들이 피해의식/패배주의에 빠져 인생 낙오자의 길을 자초하는 사태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 뉴욕시 등 캘리포니아 노숙자 수 및 가게 물건 훔침의 급증). CRT로 인해 2020년 전국적으로 있었던 BLM 폭동 당시에도 미국 민주당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이를 옹호하며 계속 부추기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팀 켈러 목사님은 그런 폭동자들을 “목소리가 없는 자들의 아우성” 이라며 옹호하는 글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5] (개인적으로 저는 저의 아이들에게 다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오직 이 3가지에 대한 피해자이다: 너의 게으름, 너의 무지, 그리고 너의 잘못된 선택/습관. 너의 인생에 대해서 외부나 사회를 탓하려고만 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살아라.)

켈러 목사님의 이런 정치성향은 그의 신학과 복음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켈러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사회에서 압제 당하는 자들과 소외당하는 자들에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무한한 희생’이라고 정의할 만큼 복음에 대한 왜곡된 관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6] 켈러 목사님에 의하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죄로부터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질병과 빈곤과 불의로 부터 새롭게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7] 고로 예수님은 압제 당하는 자들의 정치적인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위의 발언은 그럴싸 하게 들릴 수 있지만, 엄밀히 보면 성경을 아주 잘못 이해하는 위험한 사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1). 

그렇다면, 켈러 목사님의 주장대로, 예수님은 정말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치적인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와 2,000년 전 예수님 당시 로마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 사회를 비교 했을 때, 어느 사회가 더 ‘압제와 불평등’이 심했을까요?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예수님은 왜 한마디도 사회정의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거꾸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만약 로마 군인이 너에게 억지로 5리를 가라고 하면, 같이 10리를 가라’, 또 ‘너의 겉옷을 탈취하려는 자에게는 너의 속옷까지 주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열두 제자 중에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폭력적인 정치 혁명을 꿈꾸며 젤롯당원으로 살았던 시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당시 불의한 사회를 뒤집어 엎으려는 노력을 그만두고 오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8]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로마시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진 21세기 시대에 살면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정부구원주의’에 빠져 젤롯당 시몬과 같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유토피아 실현 정치적 혁명의 수단으로 쓰려고 하는 것일가요?

사실 지난 2,000년 사회의 진보를 보면 어떠한 혁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 전도 및 한 영혼 한 영혼의 중생으로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 진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하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혁명은 1776년 미국 독립 혁명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흔히 미국을 300년도 안되는 역사가 없는 나라로 무시하곤 하지만, 다르게 보면 미국은 현존하는 현대국가들 중에 제일 오래된 위대한 인류 실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부분 영국 개신교 신자들) 성경의 불변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가치 반석 위에 헌법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이는 The Federalist Papers 보면 익히 알 수 있습니다. [9]

하지만 이제와서 ‘진보’를 외치는 세력들은 이러한 성경적인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를 무시한 체 ‘다양성’과 ‘평등’을 앞세우며 전체주의적 국가 정책을 옹호하고 또 그에 대한 비판을 무섭게 벌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영국은 이제 매년 6월이 되면 온 동네방네 및 사이버 공간에 동성애/성전환 주의를 상징하는 무지개가 도배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소리를 하면 즉시 해고 되고 정치적으로 묻히게 되는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1984나 나치 독일을 연상케 하는 무서운 획일성 전체주의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 동성애의 죄가 다른 죄악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 ‘프라이드’ 운동은 유일하게 성경이 죄라고 말하는 간음에 대해 이는 죄가 아니라 우리가 celebrate 해야 하는 가치라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또 그에 대해 죄라고 말하는 교회를 핍박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 켈러 목사님은 어떻게 답변하였을까요? 물론 켈러 목사님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원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났다”라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켈러 목사님은 동성애를 정죄하는 교회가 더 큰 문제라고 하면서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실천하려면 교회가 힌두교인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 같이 동성애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만 하다 본론은 얘기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오히려 2022년 팀 켈러 목사님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의 제일 큰 문제가 바로 Christian Nationalism & Fanaticism 극우주의 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한 채 자유주의 신학으로 빠지는 것, 또 극도로 좌경화된 세상에서 동성애 운동을 무기화 시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안팍에서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도널드 트럼프를 다시 2024년 재선 시키고 싶어하는 기독교인들이 제일 큰 문제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팀 켈러 목사님의 정치성향과 세상과의 타협에 대해 간단히 봤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사실 또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 보다는 인간의 지혜와 이 세상의 철학에 호소하는 그의 전도 철학이 그것입니다. 그의 많은 저서들을 보면, 성경을 인용하기 보다는 수많은 이 세상의 철학가들을 인용하고 그들의 논리를 따르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그냥 세상에 더 읽히기 쉽게 하기 위한 노력 (바울이 아테네에서 했던 설교 처럼)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더 세상에 알린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많은 부분을 세상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체 검열 한 것 뿐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신자들에게 항상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겉 보기에는 더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3:15-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18)

저에게는 지금 전세계에 흩어진 한국 교회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지금 영어권에서는 저의 위의 글과 같은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들이 그래도 좀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100이면 100, 다 켈러 목사님에 대한 찬미와 찬사 뿐인게 참 우려스럽습니다. 팀 켈러와 존 스토트의 라인을 따라 사회정의 및 환경주의(creation care)를 복음에 혼합 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르더라도 “오직 복음!” 을 외쳤던 스펄전, 토저, 마르틴 로이드 존스의 본을 따르는 한국교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목회자들이 먼저 빨리 깨어서 왼손과 오른손을 모르는 성도들에게 먼저 교리 교육과 성경적인 세계관 및 가치관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서 범람하는 거짓을 제대로 분별할 수 있고 복음의 진리에 바르게 설수 있게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성경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깨어서 기다리며 거룩을 실천하는 순결한 신부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 글 쓰기에 엄청 망설였지만, 성령님께서 이러한 글을 쓰라고 부담을 계속 주십니다. 이제 막 집사가 된 아타나시우스가 자기보다 40살 연상이고 수 많은 지지자들을 거느리며 헬라권 기독교계를 꽉 잡고 있던 아리우스 장로를 대적했을 때 한 말이 생각 납니다: “만약 세상이 진리와 맞선다면, 나는 세상에 맞서겠노라” “If the world is against the truth, then I am against the world.”

  1. https://www.theatlantic.com/ideas/archive/2023/02/christianity-secularization-america-renewal-modernity/672948/
  2. https://youtu.be/wYaRYJ7QXps
  3. Reason for God, introduction, p xi
  4. Generous Justice, p7
  5. 트위터
  6. “Jesus’ life, death and resurrection was an infinitely costly rescue operation to restore justice to the oppressed and marginalised”. Reason for God, pp56-57 
  7. “The ultimate purpose of Jesus is not only individual salvation and pardon for sin but also the renewal of this world, the end of disease, poverty, injustice.. Christians therefore can talk of saving the soul and of building social systems that deliver safe streets and warm homes in the same sentence.. God hates the suffering and oppression of this material world so much, he was willing to get involved in it and to fight against it.” The Prodigal God
  8. 이는 사실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사도행전 1:6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물었음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9. 미국독립혁명과는 반대로, 무신론/유물론/지성제일주의로 시작한 프랑스 혁명은 그 전 상태보다 더 흉측한 피비린네 나는 전체주의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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