בשם יהושוע ✦ Joseph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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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한 복음과 팀 켈러의 좌익 사상

2023년 5월 팀 켈러 목사님의 서거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가족들과 친지, 뉴욕 리디머 교회에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이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켈러 목사님은 실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뉴욕시에서의 개척 목회, 수많은 신앙 서적들, 그리고 Redeemer City to City 국제사역을 통해 20–21세기 복음주의 기독교계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20대 때 결혼의 의미 등 켈러 목사님의 저서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젊은 층 목회자들 사이에서 그분의 영향력은 지금도 막대합니다.

하지만 켈러 목사님은 수백만 신자들의 신학을 형성한 공인 신학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세상의 칭찬보다 그리스도의 칭찬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라면, 그 사상을 정직하게 살펴볼 책임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의문을 품게 된 계기

제가 켈러 목사님의 사상에 본격적으로 의문을 품게 된 것은 2022년 4월입니다. 그분은 트위터에서 낙태에 대해 — 매년 수백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그 죄악에 대해 — “이것은 정치적인 이슈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낙태 합법화에 대해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1

도대체 어떠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진 목회자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더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파면 팔수록 심각한 문제들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켈러 목사님은 본인이 중고등부 때 만난 지도교사 — 극좌파 행동주의자 — 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고백합니다.2 대학 진학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 불평등을 이 세상의 최고 악으로 보고, 모든 인간 관계를 압제자/피압제자의 프레임으로 읽는 세계관입니다.

또한 그분은 목회 전반에 걸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Gustavo Gutiérrez)를 자주 인용했습니다 — 마르크스주의를 카톨릭 신학에 접목시켜 해방신학을 만든 남미 카톨릭 주교로, “가난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God’s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라는 문구를 만든 인물입니다. 이 개념은 Generous Justice 전반에 걸쳐 나타납니다.3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말씀합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를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레위기 19:15)

비판이론은 성경적 인간관과 근본적으로 상충합니다. 개개인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을 오직 집단 정체성(인종/성별/성적 성향)의 렌즈로만 해석하고, 구조적 불평등의 피해자로만 바라봅니다. 이 틀 안에는 죄가 없고 억압만 있으며, 구원이 없고 혁명만 있습니다.

왜곡된 복음관 — 켈러 자신의 말로

이러한 사상적 뿌리는 결국 켈러 목사님의 복음관을 오염시켰습니다. 그분의 직접적인 말을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압제 당하는 자들과 소외된 자들에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무한히 값비싼 구조 작전이었다.”The Reason for God, pp. 56–574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구원과 죄 사함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갱신, 질병과 빈곤과 불의의 종식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물질 세계의 고통과 억압을 너무도 미워하셨기에 그 속에 기꺼이 들어오셔서 그것과 싸우셨다.”The Prodigal God5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21)

빈곤에서가 아닙니다. 구조적 억압에서가 아닙니다. 죄에서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가혹한 군사 점령 아래에서 사셨습니다 — 오늘날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회정의”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 중 시몬은 젤롯당원이었습니다 — 로마 지배를 폭력으로 전복하려던 혁명가.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을 경험한 후, 그는 혁명 의제를 완전히 버리고 복음 전파에 목숨을 바쳤습니다.6

이것이 패턴입니다. 정치적 해방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아니었고, 그분의 사도들의 사명도 아니었습니다.

켈러 목사님이 2020년 BLM 폭동자들을 “목소리 없는 자들의 아우성”이라며 공개적으로 옹호했을 때,7 그것은 그분이 이 이데올로기적 틀로부터 얼마나 멀리 끌려갔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침묵해야 할 곳에서의 침묵

켈러 목사님은 동성애가 “하나님의 원래 창조 원리에서 벗어났다”고는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비난의 화살을 교회로 돌렸습니다: 동성애를 정죄하는 교회가 더 큰 문제라며, 힌두교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만 했습니다 — 정작 본론은 피하면서요.

그리고 2022년,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켈러 목사님은 자유주의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LGBTQ+ 이념이 교회를 안팎에서 공격하는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지목한 최대 위협은 기독교 민족주의와 “광신주의” — 사실상 트럼프 재선을 원하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 답변에서 빠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더 근본적인 문제: 선지자적 진리보다 세상 지혜

가장 깊은 곳에서, 켈러 목사님의 전도 방법론은 선지자들의 권위보다 철학자들의 지혜에 기댔습니다. 그분의 저서들은 세상 사상가들을 폭넓게 인용하고, 성경은 종종 기초가 아닌 보조 자료 역할을 합니다. 이것을 문화적 소통, 즉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것처럼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만나는 방법이라고 변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바울은 부활과 다가오는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조롱을 받았지만 그 내용을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켈러 목사님의 방법은 세상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을 자체 검열한 것에 더 가깝습니다. 성경은 이런 지혜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서 3:15–1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는 이 세상에게 항상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결점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결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것을 저는 오래 망설였습니다. 켈러 목사님을 사랑하는 분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의 개인적 믿음이나 목회가 낸 진정한 열매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해야 합니다. 사회정의환경주의(creation care)를 복음에 혼합하는 것은 사소한 추가가 아닙니다 —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팀 켈러와 존 스토트는 이 길을 걸었습니다. 스펄전, 토저, 마르틴 로이드 존스는 걷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문화 흐름을 거스르며 사회적 대가를 치르면서도 “오직 복음!”을 외쳤습니다.

목회자들이여, 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특정한 사상과 언어와 프레임에 의해 조용히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적 세계관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치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먼저 가르칠 것입니다.

이 글을 마치면서 한 역사적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제 막 집사가 된 아타나시우스가 자기보다 40살 연상이고 헬라권 기독교계 전체를 등 뒤에 두고 있던 아리우스를 홀로 대적했을 때 한 말입니다:

“만약 세상이 진리와 맞선다면, 나는 세상에 맞서겠노라.” (If the world is against the truth, then I am against the world.)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그 정신입니다. 타협이 아닙니다. 세상이 박수를 보낼 때까지 깎아낸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 그 자체 — 세상에게 미련하고, 망하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며,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그 복음입니다.


업데이트: 이후 복음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더 깊이 다뤘습니다 — 속죄에 대하여.

Footnotes

  1. https://youtu.be/wYaRYJ7QXps

  2. The Reason for God, introduction, p. xi

  3. Generous Justice, p. 7

  4. The Reason for God, pp. 56–57

  5. The Prodigal God

  6.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6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여 이스라엘 나라를 이 때에 회복하심이 이러하니이까”라고 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트위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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